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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15 00:06

고등학생

가지가지한다고.... 피부병이 있어요. 얼추 십년가까이.
특히나 여름이면 고생을 좀 합니다.
그래서, 요즘처럼 뜨겁기도 따갑기도 한 여름날 한낮에는 가급적 돌아다니지 않아요.
피부과는 나같은 백수에겐 지나치게 비싸거든요. ㅠ.ㅠ
그래도 부득이하게 한낮의 외출을 감행해야 할때는,
양재천 아주머니들의 썬캡은 차마 못쓰더라도, 집에 굴러다니는 정여사의 양산을 냅다 들고 나옵니다.

어제도 그런 날이죠.
지나치게 쨍한 날. 뜨거워서 따갑기까지 한 날.
양산을 푹 눌러쓰고, 왼쪽엔 커다란 가방을, 오른쪽엔 커다란 노트북 가방을 짊어지고 집을 나섰는데,
길가던 누군가와 제대로 부딪혔어요.

아마 내 잘못이었겠지요. 양산때문에 눈앞에 별로 뵈는게 없었으니까요.
민망함과 미안함에 죄송하다는 인사를 하려는 찰나,

"씨팔"

헉. 길가다가 좀 부딪혔다고 그런 쌍욕을 들어야 하는걸까요.
이건 뭔가 싶어, 양산을 올려 상대방을 쳐다봤더니,
짦은 체크교복치마, 터질듯한 교복 블라우스를 입은 여고생이더군요.
교복을 입었으니 여고생이 맞긴 할텐데...
머리는 이효리보다 밝은 갈색에, 아이라인은 가인보다 더 두껍고, 심지어 언더라인에 마스카라까지 한 고등학생이라니.

평상시 같으면, 움찍했을꺼에요. 요즘 고등학생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는 잘 알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요즘 난 좀 제 정신이 아니랍니다.

"씨팔"소리에 당황함은 잠시,
순간적으로, 본능적으로, 무의식적으로 ... 내 눈에서 레이져가 나갔어요.
아.... 그런 식의 레이저는,  바닥에 침 좀 뱉던 십오년전에나 쏘던 것인데...
전문용어로는 째려본다... 야린다... 등이 있죠.

아무튼, 난 그 고등학생의 "씨팔"소리에 본능적으로 반응했고,
잠시 정적.
솔직히, 그제서야 좀 무서워지더군요. 그렇다고 이미 발사된 레이저를 거둬들일 수는 없는 법.
다행히도, 잠시의 정적을 깨뜨린건, 그 여고생이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한 마디를 남기고 총총총 사라지더군요.

푸하하. 그 순간,
무사히 위기를 넘겼다는 안도감과,
그래도 어린 친구한테... 내가 좀 심했나 싶은 미안함과,
'아직 죽지 않았다'는 이상한 자신감이 한데 뒤섞여 기분이 묘해지더군요.
집에서 지하철역까지 걸어가면서 흐흐흐... 혼자 좀 히죽거렸습니다.

자정이 넘은 이 시각,
동네 커피숍에 딱 봐도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4명이 떠들고 있어요.
대화라고 하기엔, 비속어와 욕설과 은어가 너무 많이 섞여 있어 마치 암호처럼 들리네요. 

다시금 내 안의 무언가가 꿈틀꿈틀. 
벌떡 일어나 씩씩하게 걸어가 다시금 레이져를 쏘고 싶지만...  

짐 싸서 집에 가야겠어요.
결코 시끄러워서나 무서워서가 아니라... 시간이 늦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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