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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30 09:40

씨네바캉스

학원은 땡땡이쳐도, 비디오가게는 빼먹지 않는 고등학생이었던 만큼,
집에서 2분거리에 있는 비디오가게의 주인장보다, 집에서 20분거리 대치동 영화마을 알바생보다,
훨씬 더 빠르고 정확하게 비디오의 위치를 파악하는 재주가 있었죠. 
그때 나의 목표는, 반에서 몇등이 아니라, 
비디오가게 이 끝에서 저끝까지 비디오를 다, 전부, 몽땅, 보는 것이었으니까요.
가끔 낯선 영화를 찾는 손님이 오면, 내가 찾아서 꺼내주고는, 생색을 내곤했어요.

그때의 나는, 영화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전에,
비디오가게에서 알바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더 컸어요. 타란티노처럼.
비디오가게 알바를 하면서, 원없이 비디오를 보고, 이상하고 낯선 영화들에 이야기 나누며, 
함께 뚝딱뚝딱 재밌는 영화를, 재밌게 만드는 상상을 했으니까요. 타란티노처럼.

서울아트시네마의 씨네바캉스, 마지막날.
오후에 잡혀있던 회의가 저녁때로, 다시, 아침으로 밀린 덕분에, 바캉스의 마지막을 즐길 수 있게 되었어요.



<재키브라운>. 98년도 개봉작이에요.
타란티노의 영화라고, 개봉하는 날에 맞춰, 신촌의 어느 극장에서 봤어요.
그때의 나는, 공부를 하기 싫어했던 평범한 수학과 학생이었을 뿐이었는데,
영화 관객으로만 존재했던 시절에 극장에서 보고 마냥 즐거워했던 영화를,
영화가 직업이 된 지금,  극장에서 다시 보는 기분이란게 참 묘하네요.



이름마저 섹시한 마를렌 디트리히의 그 유명한 공연장면과 그녀의 담배피는 모습을 드디어 마주하고,
타란티노의 <재키브라운>을 극장에서 다시 본다는건, 얼마나 설레는 일인지.


게다가, <재키브라운>의 원작소설인 <럼펀치>를 선물로 받았네요.
극장에 들어가면서 선물을 받아본게 이 얼마만인지.
고등학생일때는, 선착순으로 나눠주는  포스터 한장 받겠다고, 토요일에는 학교도 땡땡이치고 교복을 입은채로,
관객이 많지 않은 뤼미에르, 씨네하우스, 동숭시네마테크를 쫓아다녔었는데..

어쨌든, 
조셉 폰 스텐버그의 <모로코>는 그 명성만큼, 아름다웠고,
쿠엔틴 타란티노의 <재키브라운>은 영화도 영화지만, 영화를 통해 과거의 나를 마주한 느낌이랄까.

연달아 두편의 영화를 보고, 새로 문을 열었다는 교보문고에 들렸어요.
비가 오는 일요일 저녁이라 그런지 사람이 생각보다 많지는 않더군요.
남아있는 교보북마일리지로, 개장기념으로 책 한두권정도 사올까 싶었는데,
극장에서 받은 소설책까지, 가방이 너무 무거워서 그냥 실컷 구경만 하다가 돌아왔어요.

간만에 극장에서 영화 2편과, 서점나들이에 그리도 흥겨웠던걸 보면, 어쩔수 없는 딴따라가 맞기는 한가봐요.
그 느낌 그대로 곧장 집앞 카페에서 작업을 해야겠다 생각했었죠.
이미 영화 2편과 책구경을 실컷했으니, 밥 생각 따위는 들지도 않았으니까요.

사람이 별로 없는 지하철에서 혼자 재키브라운의 대사들을 생각하며, 혼자 히죽거리고 앉아 있는데,
내 옆자리의 여자분이 가방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는데, 그것은 '너구리' 한봉지.
지극히 평범해보이는 여자분께서, 너구리 한봉지를 꺼내더니, 라면을 부시고, 스프마저 좀 뿌리더니,
봉지째 흔드시는거에요. 지하철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풍경은 아니었으니, 신기할 수 밖에요.
내가 계속 힐끔거리며 쳐다봤음에도 불구하고,
그 여자분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마치 극장에서 팝콘을 먹는것처럼,
너구리 봉지에서 생라면을 꺼내 와그작와그작 맛있게 씹어드시더군요.
소리까지 맛있다는 표현의 소리는, 아마도 생라면 씹어 먹는 소리를 뜻하는 것이라는 걸 알아버렸어요. 
게다가, 자극적인 라면스프의 냄새가 코끝을 스치면서, 내 뱃속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날 것만 같았죠. 
아, 역시 나는 배고픈 딴따라였어요. 

작업에 대한 의지는 결국, 너구리 한봉지때문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곧장 집으로 들어왔어요. 
너구리에 대한 소심한 복수라도 하듯, 저녁밥을 심하게 많이 먹고는 급피곤해져서 그냥 자버렸네요. 

배불러서 잠깐 졸았던것이, 일어나보니 이미 자정이더군요. 
아침 9시까지 압구정동에 나가야하는, 백수에겐 심각하게 부담스러운 일정때문에 고민하다가, 
결국 밤을 새기로 결심했죠. 

아침 8시, 성수대교를 건너면서... 이게 무슨 짓인가 싶더군요. 
이젠 예전같지 않아서, 밤새는게 확실히 부담스럽고 피곤하니까요. 

근데, 문제는, 
지금 약속시간이 30분이나 지났는데, 아무도 오지 않는다는거에요. 푸하하. 

그래도 다른 날 같으면 성질을 많이 부렸겠지만, 
<모로코>때문인지, <재키브라운>때문인지, 타란티노때문인지, 교보문고 때문인지, 너구리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여전히 좋은 아침이군요. 

다들 굿모닝. 나는 굿나잇.
이제 슬슬 짐 챙겨서 나는 다시 집에 가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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